Ishikoridome-no-Mikoto
아마노이와토의 야타노카가미를 주조한 거울의 신,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
아마노이와토의 야타노카가미를 주조한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는, 잃어버린 빛을 되비추는 기물을 만드는 신이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바위굴에 숨었을 때 세상은 어두워진다. 신들은 아메노야스노카와라에 모여 오모이카네노카미의 계책에 따라 준비를 진행한다. 『고사기』 「아마노이와야」 대목은 아메노야스노카와의 단단한 돌, 아메노카나야마의 쇠, 대장장이 아마쓰마라를 찾은 뒤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에게 거울을 만들게 하였다고 적는다. 이 거울이 뒤에 바위굴 앞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이끌어 내는 중심 제구가 된다.
거울을 만든다는 행위는 아마노이와토 신화에서 매우 능동적이다. 빛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기만 한다면 신들은 계속 기도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오모이카네노카미의 계책은 빛이 없는 가운데 먼저 빛을 받아 낼 면을 만든다.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의 거울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붙잡는 덫이 아니다. 바깥 세상이 아직 신을 맞이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빛의 자리다. 거울 면은 침묵하지만, 그 침묵 속에 ‘이리로 돌아와도 좋다’는 신호가 깃든다.
고쿠가쿠인 대학의 기물 해설이 아마노이와토 신화를 고대 제사의 기원담으로 읽을 때, 거울은 구슬, 천, 점뼈와 나란히 중요한 기물이다. 거울에는 모습을 비추는 실용성만이 아니라, 신을 부르고 신의 기척을 머물게 하는 힘이 있다.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는 이 기물의 제작을 맡은 신으로서, 신화의 아름다운 표면과 금속 가공의 무거운 현장을 잇는다. 불, 금속, 돌, 거푸집, 연마. 그 모든 것이 신 앞의 거울 한 장으로 모인다.
천손강림에서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는 이쓰토모노오의 하나로 지상에 내려온다. 『고사기』 「천손강림」 대목은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를 가가미쓰쿠리노무라지 등의 조상으로 적는다. 이는 아마노이와토에서 아마테라스 오미카미를 이끈 거울의 기술이 지상의 씨족과 제사로 이어진다는 뜻이다. 거울 만들기는 개인의 솜씨가 아니라 신화에 뿌리를 둔 직능이며, 천손의 통치를 떠받치는 제사 기술의 일부가 된다.
히노쿠마 신궁·구니카카스 신궁의 공식 유서는 이 신을 ‘石凝姥命’이라는 표기로 모시며 또 다른 거울 이야기와 잇는다. 히노쿠마 신궁은 히가타노카가미를 신체로 하여 히노쿠마노오카미를 모시고, 구니카카스 신궁은 히보코노카가미를 신체로 하여 구니카카스노오카미를 모신다. 공식 개요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하늘의 바위굴에 숨었을 때 오모이카네노미코토의 의논에 따라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를 대장장이로 삼아 아메노카구야마의 구리로 거울을 주조했다고 전한다. 여기서 거울 만들기 신의 직능은 히노쿠마·구니카카스라는 두 대신(大神)의 신앙으로까지 넓어진다.
히가타노카가미와 히보코노카가미는 야타노카가미와는 다른 계통을 지니면서도, 같은 아마노이와토의 어둠에서 태어난 거울로 이야기된다. 공식 개요는 히노쿠마 신궁·구니카카스 신궁이 이 두 거울을 신체로 삼으며, 삼종 신기에 버금가는 보경(寶鏡)으로서 조정의 숭경을 받았다고 적는다.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의 신격은 여기서 ‘거울을 만든 신’에서 ‘황조신에 가까운 거울의 내력을 떠받치는 신’으로 넓어진다. 거울은 신의 모습이며, 신 그 자체를 맞이하는 요리시로(依代)이기도 하다.
이 신을 오늘의 시각으로 읽는다면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는 반사와 기록의 신이다. 거울, 렌즈, 사진, 영상, 계측, 검사, 디자인, 금속 연마. 모두 대상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면서 무언가를 보이는 형태로 만드는 기술이다. 어둠 속에서 거울을 만든다는 신화는, 혼란 속에서 사실을 비추는 도구를 갖추는 일과도 통한다.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는 눈부신 빛을 휘두르는 신이 아니다. 빛이 돌아왔을 때 그것을 받아 내고, 비추고, 세상으로 돌려보낼 면을 묵묵히 만드는 신이다.
나아가 이 신의 거울은 자기 인식의 도구이기도 하다.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바위굴에서 밖을 내다볼 때, 거울은 그저 바깥 세상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신 자신의 모습을 신에게 되돌려 준다. 숨어 버린 이가 다시 한번 자신의 빛을 보고 세상과의 관계를 다시 맺는다. 그 계기를 만드는 이가 이시코리도메노미코토다. 거울을 만든다는 것은 잃어버린 중심이 자신을 되찾기 위한 면을 마련하는 일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