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이 반도(紀伊半島)의 남단, 쿠로시오(黒潮)가 씻어내는 암초와 혼슈에서 가장 깊다고 일컬어지는 기이 산지의 주름 속에 와카야마현(和歌山県)──과거의 기이국(紀伊国)이 가로놓여 있다. 이 땅의 요괴를 이야기할 때, 우선 주시해야 할 것은 이곳이 일본 굴지의 양대 영장(霊場)을 품은 땅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는 쿠마노 산잔(熊野三山), 다른 하나는 고야산(高野山)이다. 망자가 향하는 타계(他界)이자 부활의 정토이기도 한 쿠마노, 그리고 구카이(空海)가 진언밀교의 근본 도량으로 개산한 고야. 성스러운 것이 극한까지 짙게 엉긴 땅에는, 그 이면으로 이형(異形) 또한 짙게 피어난다.
기이의 괴이를 관통하는 실은 두 가닥이다. 하나는 '영장으로 향하는 길'이다. 개미의 쿠마노 참배(蟻の熊野詣)라 불린 순례 행렬이 밟아 다진 쿠마노 고도(熊野古道), 그 밤길에 오쿠리스즈메(送り雀)가 울고, 하테나시(果無)의 산에 잇폰다타라(一本だたら)가 외발 자국을 새기며, 산속의 여자가 "불 좀 빌려줘"라며 초롱불로 다가온다. 다른 하나는 '뱀의 몸으로 변하는 정념'이다. 배신당한 여자가 큰 뱀이 되어 종과 함께 남자를 태워 죽이는 도조지(道成寺)의 이야기는, 신앙의 길 한가운데서 사람의 정이 괴이로 전락하는 순간을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없을 만큼 그려냈다. 신들의 땅과 그곳으로 향하는 자의 업(業)──이 두 가지가 기이의 요괴를 키웠다.

구마노 곤겐
구마노 곤겐(Kumano Gongen)은 구마노 삼산(구마노 본궁 대사, 구마노 하야타마 대사, 구마노 나치 대사)에 모셔진 신들의 총칭으로, 일본 고래의 자연 숭배(신토)와 불교가 고도로 융합된 신불습합의 상징적 존재입니다. '곤겐(권현)'이란, 부처나 보살이 일본의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임시(권)로 일본 신의 모습을 취해 나타났다(현)는 의미를 가집니다. 구마노는 예로부터 험준한 산들과 깊은 숲, 바다로 둘러싸인 영지였으며, 거석이나 폭포, 대하(大河)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한 원초적인 산악 신앙이 숨 쉬고 있었습니다. 거기에 불교의 정토 사상이나 수험도의 수행 체계가 결합함으로써, 구마노 곤겐은 '현세의 구제'와 '내세의 극락왕생'을 모두 약속하는 강대한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했습니다.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서는 역대 상황(상왕)들에 의한 구마노 행차가 빈번히 이루어졌고, 이윽고 신분이나 남녀, 나아가 정(淨)과 부정(不淨)을 불문하고 모든 사람을 끌어들여, 참배객의 행렬이 끊이지 않는 모습을 가리켜 '개미의 구마노 참배'라 일컬을 정도로 일본 최대의 영장이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기쿠마노──신들의 땅과 야타가라스
와카야마 요괴 문화의 뿌리는 쿠마노 산잔에 있다. 쿠마노 혼구 타이샤(熊野本宮大社)・쿠마노 하야타마 타이샤(熊野速玉大社)・쿠마노 나치 타이샤(熊野那智大社), 이 세 신사를 핵심으로 하는 쿠마노 신앙은 기이의 험준한 산과 깊은 숲, 그리고 폭포나 거석에 대한 원초적인 경외심 위에 불교의 정토 사상과 수험도(修験道)의 수행 체계가 겹겹이 쌓여 탄생했다[1]. 쿠마노 곤겐이란 그 산잔에 모셔진 신들의 총칭이며, '곤겐(権現)'이라는 이름은 부처나 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임시로 일본 신의 모습을 빌려 나타났다는 본지수적(本地垂迹)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쿠마노가 특이한 점은 그 압도적인 포섭성에 있다. 많은 사찰과 신사가 여인금제(女人禁制)를 시행하고 부정을 기피하던 시대에, 쿠마노 곤겐은 귀족부터 서민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병자조차 일체의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그 누구도 버리지 않는다"는 이 구제의 자세가 헤이안 후기부터 가마쿠라 시대에 걸쳐 쿠마노 고코(熊野御幸, 상황이나 법황의 참배)를 낳았다. 우다 상황(宇多上皇)을 시작으로 시라카와, 도바, 고시라카와 등 역대 상황과 법황이 약 370년 동안 백 번이 넘게 도읍에서 쿠마노로 향했다[2]. 이윽고 그 순례의 열기는 신분을 넘어 퍼져나갔고, 길게 줄을 지어 험로를 걷는 모습은 '개미의 쿠마노 참배(蟻の熊野詣)'라 불릴 정도로 열광적인 양상을 띠었다.
험준한 산길을 걷는 것 자체가 한 번 의사적(擬似的)인 죽음을 맞이한 뒤, 영지에서 멸죄(滅罪)와 정화를 거쳐 새로운 생명을 얻어 부활한다는 장대한 재생의 의례였다. 쿠마노는 정토인 동시에 망자의 영혼이 향하는 황천의 타계이기도 하다──이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성격이야말로 쿠마노 곤겐 신앙의 근간을 이룬다[1].

진무 천황(神武天皇)을 야마토 가시하라(大和橿原)로 인도했다고 전해지는 세 발 달린 영조 야타가라스(八咫烏)가 쿠마노의 사자로서 숭배받는 것도 이곳이 이계와의 결절점이었던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쿠마노 신앙을 전국으로 실어 나른 것은 선달(先達)로서 사람들을 이끈 수험자(야마부시)와 쿠마노 비쿠니(熊野比丘尼)라 불린 여성 종교자들이었다. 이들은 지옥과 극락이 그려진 쿠마노 관심십계만다라(熊野観心十界曼荼羅)를 들고 전국을 돌며, 글을 읽지 못하는 서민들에게 그림을 풀어 설명함으로써 쿠마노의 생사관 심어주었다. 성지 그 자체보다도 성지로 향하는 '길'과 그 길을 걷는 자의 심상──여기에 기이의 요괴를 해독하는 첫 번째 열쇠가 있다.
쿠마노 고코의 순례자가 도읍을 떠나 가장 먼저 다다른 성지가 쿠마노 혼구 타이샤였다[2]. 과거의 사전(社殿)은 쿠마노가와(熊野川)・오토나시가와(音無川)・이와타가와(岩田川)가 합류하는 삼각주인 오유노하라(大斎原)에 진좌해 있었으나, 메이지 22년(1889)의 대수해로 많은 전각이 유실되어 현재의 위치로 천좌했다. 물과 산 사이에 낀 이 입지 자체가 산 자의 세계와 타계를 가르는 경계의 지형이었다. 야타가라스가 세 발로 그려지는 것은 천·지·인을 뜻한다고도 하고, 쿠마노 곤겐의 사자로서 태양을 나르는 영조이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현대에는 쿠마노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이의 요괴가 '길을 걷는 자'의 불안에서 태어난다는 구도는 이 쿠마노 신앙의 지리에서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누구나 걸었던 순례로, 그 고개와 폭포와 연못 하나하나에 걷는 자의 두려움이 형상을 맺었다. 다음 절부터 살펴볼 괴이의 대부분이 영장으로 통하는 산길, 강변, 고개에 나타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뱀이 된 여자──도조지와 불타버린 종
그 '길' 한가운데서 사람의 정념이 괴이로 변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히다카가와(日高川) 강가의 고찰 도조지(道成寺)에 전해지는 안친·기요히메(安珍清姫) 전설이다. 도조지는 이 사건을 엔초 6년(928)의 일이라 전하며, 11세기의 『대일본국법화험기(大日本国法華験記)』에 기록되고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에도 수록된 것으로 정리한다[3].
오슈 시라카와(奥州白河)에서 쿠마노 혼구로 향하던 젊은 승려 안친이 기이의 마나고(真砂, 현재의 다나베시)에서 하룻밤을 묵어간다. 숙소의 딸, 훗날 기요히메로 불리게 될 여자는 안친을 한눈에 보고 사랑에 빠진다. 안친은 참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다시 들르겠다고 거짓말을 하고 여자를 떠나 약속을 어기고 도망친다. 배신당한 사실을 안 여자의 추격은 인간의 달리기에서 점차 이류(異類)의 변화로 바뀌어 간다. 히다카가와에서 뱃사공이 배를 내주지 않자, 여자는 분노에 찬 채 강에 몸을 던져 뱀의 몸이 되어 물을 건넜다[3].

기요히메
기요히메는 기이국 도조지에 전해지는 안친 기요히메 전설의 뱀 여인이다. 구마노 참배를 가던 승려 안친을 사랑하여, 약속을 어겼다고 생각하자 히다카가와 강을 넘어 쫓아가 뱀의 몸으로 변해 도조지의 종에 숨은 안친을 태워 죽였다. 도조지는 이 이야기가 엔초 6년(928)의 사건이라고 전하며, 11세기의 『법화험기(法華験記)』에 기록되고 훗날 노(能), 닌교조루리, 가부키의 '도조지모노'로 퍼졌다고 설명한다. 오래된 설화에서는 여인의 이름이 정해져 있지 않았으나, 후대의 사찰 연기, 에토키(그림 풀이), 무대 예능을 통해 '기요히메'로 정착되었다. 요괴로서의 기요히메는 뱀 신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연모가 질투와 집착에 불타 뱀의 몸으로 변한 경계적 존재이며, 한냐(般若)나 하시히메(橋姫)와 마찬가지로 여인의 원한이 얼굴과 신체, 불을 얻어 나타나는 대표적인 귀녀(鬼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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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지로 도망쳐 들어간 안친은 승려들에 의해 범종 안에 숨겨진다. 하지만 뱀이 된 기요히메는 종을 겹겹이 휘감고 자신의 몸에서 내뿜는 열기로 종과 함께 안친을 모조리 태워버렸다. 중요한 점은 기요히메가 처음부터 괴물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깨어진 약속, 연모, 수치심, 질투, 종교자에 대한 불신이 한꺼번에 겹쳐지면서 한 명의 인간 여자가 뱀으로 변모한다. 야마타노오로치(八岐大蛇) 같은 원초적인 거대 뱀 요괴와 달리, 기요히메는 한냐(般若)의 가면이 나타내는 '분노와 슬픔의 공존'에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4].
그리고 이야기의 또 다른 주역은 불타버린 종 그 자체이다.

도조지의 종
도조지 연기로 유명한 대형 범종. 승려 안진이 종 속에 숨자, 연정이 원념으로 바뀐 여인이 뱀으로 변해 몸을 휘감고 불길로 종을 태웠다고 전한다. 전승에는 종이 끓는 물처럼 변해 승려를 삼킨다는 노가쿠적 묘사와, 물로 불을 끄고 종이 남았다는 연기 설이 나란히 전한다. 도리야마 세키엔은 『금석백귀습유』에서 ‘도조지의 종’이라 하여 이 이설을 도해했다.
자세히 보기도조지 종에 대한 전승은 이본(異本)마다 크게 요동친다. 『도조지연기(道成寺縁起)』에서는 여자가 뱀의 몸이 되어 종에 휘감겨 불을 뿜었고, 오랫동안 타오른 뒤 물로 불을 끄고 종을 치웠다고 한다. 반면 노(能) 『도조지』에서는 "종은 곧 쇳물이 되어" 야마부시를 삼켰다고 읊으며 종이 열에 녹아내리는 묘사가 강조된다[4]. 도리야마 세키엔(鳥山石燕)은 『금석백귀습유(今昔百鬼拾遺)』에 '도조지 종'을 도해하면서 "종이 녹아 쇳물이 된다"고 적었고, 동시에 당시 그 종이 다른 절에 납입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병기했다. 괴이가 전승의 과정에서 어떻게 변주되어 가는지를 이 종만큼 잘 보여주는 기물은 없다.
이 이야기가 기이국에 고유한 이유는 그것이 '쿠마노 참배'라는 구체적인 신앙의 길 위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안친은 오슈 시라카와에서 쿠마노 혼구를 향하던 참배승이었고, 기요히메의 숙소는 쿠마노 고도 연선의 마나고에 있었다. 즉 안친·기요히메 전설은 앞서 살펴본 '개미의 쿠마노 참배' 순례길을 무대 장치로 성립된 것이다. 성지로 향하는 청정한 길이기에 그곳에서 깨진 약속과 배신당한 정념이 더욱 깊은 죄와 괴이로 전락한다──도조지의 이야기는 쿠마노 신앙의 지리를 빼놓고는 태어날 수 없었다. 지금도 히다카가와초(日高川町)에는 안친이 건넜다고 전해지는 나루터의 흔적이나 기요히메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무덤들이 흩어져 있어, 이야기가 땅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도조지의 이야기는 사찰 연기(縁起)로서만이 아니라 에토키(絵解き, 그림 설명)와 예능을 통해 수차례 재연되었다. 도조지에서는 오늘날에도 승려가 두루마리 그림을 펼치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에토키 설법'이 이어져 방문객들은 안친과 기요히메의 비련을 육성으로 듣는다. 노 『도조지』에서는 여인금제인 종 공양의 자리에 시라뵤시(白拍子)가 나타나 춤을 추며 종으로 다가가다 마침내 종 속으로 뛰어든다. 이윽고 종 안에서 뱀의 몸을 한 귀녀가 나타나 승려들의 기도로 진압된다──과거의 비련이 무대 위에서 '현재의 괴이'로서 재가동하는 것이다. 종 안으로 배우가 사라지는 '가네이리(鐘入り)'는 노의 연목 중에서도 굴지의 난곡(難曲)으로 꼽힌다[4]. 근세에는 이것이 인형 조루리, 가부키, 무용으로 전개되어 '무스메 도조지(娘道成寺)'를 비롯한 도조지물의 거대한 계보를 형성했다[5]. 기요히메는 이제 단순히 '질투심 많은 여자'의 교훈담에 머물지 않고 사찰의 유서, 쿠마노 참배로, 종 공양, 무대 예능, 뱀 신앙을 연결하는 강인한 결절점이 되었다.
고야와 기이의 깊은 산──텐구・잇폰다타라・오쿠리스즈메
쿠마노가 남쪽 바다를 향해 열린 영장이라면 북쪽 산중에 우뚝 솟은 것이 고야산이다. 고닌 7년(816), 구카이(홍법대사)가 조정의 허락을 얻어 해발 약 1,000미터의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분지를 진언밀교의 근본 도량으로 열었다[6]. 깊은 산에 틀어박혀 법력(法力)을 연마하는 이 땅의 성격은 자연스레 산의 주인인 텐구의 영분(領分)과 겹쳐지게 된다.

덴구
덴구는 일본의 산악에 깃든다고 하는 요괴이자 신격적 존재로, 수험도의 야마부시와 떼려야 뗄 수 없이 결부되어 온 산의 주인이다. 그 모습에는 크게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붉은 얼굴에 높은 코, 야마부시의 차림을 하고 깃부채와 외이 굽 높은 게다를 갖춘 하나타카 덴구(코 높은 덴구), 또 하나는 까마귀의 부리와 날개를 지닌 가라스 덴구이며, 그 아래로 고노하 덴구·곳파 덴구 같은 하위 권속이 이어진다. 예전에는 솔개 같은 새의 모습으로 관념되던 것이, 중세를 거치며 긴 코의 야마부시 상으로 굳어 갔다. 덴구는 불법을 방해하는 마이면서, 조복되면 불법을 지키는 호법신으로 바뀐다——이 양의성이야말로 덴구의 본질이다. 교만한 고승이 떨어져 덴구가 된다는 관념은 불교가 설하는 “덴구도”와 결부되어, 가마쿠라 말의 그림두루마리에도 풍자로 그려졌다. 한편 산악 신앙 안에서는 산의 수호자, 무예와 법력의 달인으로 외경받아, 수행자를 시험하거나 이끄는 존재로 여겨졌다. 교토의 구라마산·아타고산을 비롯해 제국의 영산에는 저마다 대덴구가 좌정한다고 전하며, 근세의 『덴구경』은 그 총수를 마흔여덟으로 헤아린다.
자세히 보기텐구는 야마부시와 떼려야 뗄 수 없게 결탁한 산의 주인이자, 불법을 방해하는 마(魔)이면서도 조복(調伏)되면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護法神)으로 돌변한다는 양의성(両義性)을 그 본질로 삼는다. 교만해진 고승이 타락하여 텐구가 된다는 관념은 불교에서 설파하는 '텐구도(天狗道)'와 결부되었다. 에이닌 4년(1296) 무렵의 『텐구조시(天狗草紙)』는 남도(南都)와 북령(北嶺)에 있는 이름난 사찰의 오만한 승려들을 텐구에 빗대어 풍자하고 있어, 텐구가 '불도의 교만의 상징'으로 중세에 관념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여러 구니의 영산에는 저마다 대텐구가 자리 잡고 있다고 믿어졌으며, 근세의 『텐구경(天狗経)』은 그 총수를 48개로 헤아린다. 수험의 성지인 고야 역시 그러한 텐구가 사는 산으로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이 홀연히 사라지는 텐구카쿠시(天狗攫い, 행방불명), 큰 나무를 베는 소리가 울려 퍼지지만 다음 날 아침에는 아무것도 없는 텐구다오시(天狗倒し), 산중에 메아리치는 텐구의 웃음소리──산에서 일어나는 불가해한 일들은 전부 텐구의 소행으로 이야기된 것이다.
고야산이 텐구의 영분과 겹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구카이는 당나라 장안의 청룡사(青龍寺)에서 혜과(恵果)에게 밀교를 배웠고 귀국 후 중생 제도의 근본 도량으로서 인적 드문 깊은 산을 구했다. 해발 1,000미터급의 봉우리들로 둘러싸인 이 단절된 땅은 그야말로 속세와 떨어진 수행의 터전이자, 동시에 산의 영위(霊威)가 가장 짙게 응결되는 공간이기도 하다[6]. 법력을 다루는 행자와 그 법력을 시험하거나 방해하는 텐구는 동일한 깊은 산의 논리에서 파생된 한 쌍의 존재인 것이다. 고야의 산중에서 행자가 겪는 불가해한 현상──길을 잃거나, 소리가 들리거나, 물건이 사라지는 일──은 수행의 시련인 동시에 텐구의 영역에 발을 들인 증거이기도 했다.
깊은 산의 괴이가 텐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와카야마와 나라의 경계를 이루는 하테나시 산맥(果無山脈)에는 접시 같은 외눈에 외발을 한 산의 영령이 산다고 전해졌다.

일본다타라
일본다타라는 한쪽 눈에 외다리로 나타난다고 전해지는 산의 요괴로, 기이의 구마노와 나라의 오바가미네 등지에서 이야기된다. 눈 위에 넓고 큰 단일 발자국만 남기는 것으로 유명하며, 실제 모습을 본 사람은 드물다고 한다. 출현일을 12월 20일 ‘하테노 하츠카’로 한정하여 그날은 산에 들지 말라 경계하는 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대장간과 타타라 제철과의 관련성, 한쪽 눈의 대장장이 신이 몰락한 형상이라는 해석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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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폰다타라는 12월 20일인 '끝의 20일(果ての二十日)'에만 나타난다고 전해지며, 그 모습을 본 자는 없고 눈 위에 폭 1척(약 30cm) 정도의 하나의 발자국을 남길 뿐이라고 한다. 외발로 날 듯이 달리며, 소리를 지르면 그 소리에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질 정도라고도 하고, 마주치면 병을 얻는다고 하여 산에 들어가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하테나시(果無, 끝이 없다)'라는 이름조차 이 시기에 인적이 끊기는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전해진다[7]. 그 핵심에는 나라 오바가미네(伯母ヶ峰)의 이자사오(猪笹王) 이야기가 있다. 등에 조릿대가 자란 거대한 멧돼지가 사냥꾼에게 총을 맞고 쓰러지자, 그 망령이 외발 달린 오니로 화하여 고개를 넘는 나그네를 습격했다. 이를 단세이 상인(丹誠上人)이 봉인하고 1년에 단 하루 이날만 풀려나는 것을 허락했기 때문에 '끝의 20일'이 고개의 액일이 되었다고 전해진다[8]. 이본(異本)에서는 미녀로 둔갑한 외발이 나타나 야마노(天野)의 사냥꾼이 총을 쏘았으나 총알을 손으로 받아 던져 돌려보냈는데, 뉴쓰히메 신사(丹生都比売神社)의 신의 가르침으로 두 발이 명중하자 여자가 "끝의 20일에 지나는 자들만은 목숨을 취하게 해달라"고 빌었다고도 전한다[8]. 이름의 '다타라'를 제철업자인 다타라시(たたら師)와 통하게 하여 한쪽 발로 풀무를 밟고 한쪽 눈으로 화로의 불을 계속 쳐다본 직능자의 모습이 영락한 것으로 보는 근대의 해석도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일설에 불과하다[9].
흥미로운 점은 잇폰다타라가 지금도 여전히 회자되는 살아있는 전승이라는 것이다. 와카야마현 니시무로군에서는 갓파의 일종인 '고라이'가 산에 들어가 변한 카샨보를 잇폰다타라로 부르는 사례도 있으며[8], 2004년 봄에는 시라하마초(白浜町) 톤다(富田)에서 외발의 발자국이 발견되어 '톤다의 가샨보'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8]. 하테나시라는 지명의 무거운 울림과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액일이라는 금기가 이 산의 영령을 기이의 산악 신앙 속으로 깊숙이 엮어 넣고 있다.
그리고 영장으로 향하는 밤길에는 또 하나의 잊지 못할 괴이가 있다.
나치의 세 봉우리(那智三峯) 중 하나인 해발 749미터 묘호산(妙法山)에 있는 묘호산 아미다지(阿弥陀寺) 주변에서 입에 오르내린 오쿠리스즈메는 밤의 산길에서 "치치치치" 하고 울며 사람의 뒤를 정는 괴조(怪鳥)이다. 묘호산은 예로부터 망자의 영혼이 마지막으로 오르는 산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었으며 망자의 종을 치러 오르는 풍습이 전해지는, 쿠마노에서도 손꼽히게 타계와 맞닿아 있는 영지였다. 이 새의 울음소리 뒤에는 늑대, 혹은 오쿠리오카미(送り狼)가 나타나는 전조로 여겨져 소리를 들은 자는 넘어지지 않도록 발밑에 주의를 기울이며 걸었다고 한다. 길에서 넘어지면 곧장 짐승들의 습격을 받는다고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울음소리를 실제 새인 촉새(アオジ)에 빗대어 '교자쿠(蒿雀)'라고도 부르지만, 밤에 나는 특성 때문에 촉새와의 동일시를 의심하는 설도 병존하며 나라에서는 요자쿠(夜雀, 밤참새)와 동일시하는 예도 있다[10]. 망자가 오르는 영산의 기슭, 순례의 밤길이기에 이토록 '사람을 뒤에서 보내는' 괴이가 자라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밤길에 나타나 더욱 직접적으로 목숨을 노리는 것이 니쿠스이이다. 초롱불을 들고 산길을 가는 자에게 열여덟, 열아홉의 아름다운 여자로 둔갑하여 "불 좀 빌려줘"라며 다가가서는, 초롱불을 빼앗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사람을 물어뜯는다. 와카야마의 하테나시 산맥이나 미에현 쿠마노 산속에 전해지는 괴이다. 민속학의 거인이자 기이 다나베(田辺)에 거점을 둔 미나카타 쿠마구스(南方熊楠)는 그 저서 『기슈속전(紀州俗伝)』에 니쿠스이의 기록을 남겼다. 메이지 26년(1893)에 우편 배달부가 밤길을 가다 조우하여 화승불을 내리쳐 퇴치한 이야기, 또 하테나시 산맥에서 사냥꾼 겐조가 "겐조, 불 좀 빌려줘"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 한 마리의 늑대가 옷소매를 당겨 위기를 알린 이야기 등이다[11]. 도쓰카와(十津川) 인근에서는 사냥꾼이 젊은 여자로 둔갑한 것을 수상히 여겨 부처의 이름을 새긴 총알로 쏘았더니 백골의 괴물이 되었다고 한다. 에도 시대의 기뵤시(黄表紙) 『백귀야강괴물어(百鬼夜講化物語)』에는 실내에서 남자의 정기를 빨아먹는 모습도 그려져 있어, 산속의 괴이와 근세 도시의 색기 넘치는 표현이라는 두 가지 양상이 병존한다. 불씨나 화승불을 지니라는 경고는 이 기이의 깊은 산세가 그대로 결정화된, 살아가기 위한 지혜였다.
기이의 가장 깊숙한 곳, 와카야마현에서 유일하게 고립된 월경지 마을로 알려진 히가시무로군(東牟婁郡) 기타야마촌(北山村)에는 지형 자체에 새겨진 여우 전승이 있다. 다메하치 여우는 '다메하치'라는 남자에게 씌었다고 전해지는 여우로, 폭포의 절벽을 끝까지 건너는 요력을 보여주었다고 이야기되며, 단애에 남은 줄 모양의 흔적을 그 증거로 삼는다. 다만 기타야마촌에는 절벽을 건너는 내기를 한 것이 뱀과 수험자(이카즈치 보주)였고, 수험자는 떨어졌지만 뱀이 건너갔기 때문에 흔적이 남았다는 전승도 있어, 화자나 가문에 따라 주체가 여우이기도, 뱀이기도, 수험자이기도 하다[12]. 실존 인물이나 연대는 불상하며, 지형 전승과 빙의 관념이 결합된 일화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같은 벼랑의 흔적을 '여우의 요력', '뱀의 집념', '수험자의 도전과 실패' 중 어느 것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 구비 전승의 본질이 잘 나타나 있다. 깊은 산 벼랑 한 줄기에서조차 여러 갈래의 이야기를 찾아내는 이 땅의 상상력이야말로 수험의 산맥을 헤쳐 나간 사람들이 길러낸 기이 특유의 두터운 서사의 층위인 것이다.
바다와 마을의 괴이──우시오니
영장으로 향하는 산길에 대비되는 기이의 또 다른 모습으로, 쿠로시오가 씻어내는 바다의 얼굴이 있다. 그 해변과 연못에 나타나는 것이 우시오니이다.

우시오니
우시오니는 주로 서일본의 해안과 깊은 못, 산속에 나타나는 요괴로, 사납기와 신격에 가까운 위세가 모두 두드러진다. 모습은 하나로 정해져 있지 않다. 소의 머리에 오니의 몸을 붙인 형상도 있고, 거미 몸에 소머리를 얹은 모습도 있다. 헤이안 시대의 《마쿠라노소시》는 이미 우시오니를 무서운 것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가장 큰 특징은 서로 반대되는 두 얼굴이다. 한쪽에서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잡아먹으며 독기를 퍼뜨리는 잔혹한 악귀이자 역병을 부르는 존재다. 다른 한쪽에서는 축제 행렬의 미코시를 이끌며 압도적인 힘으로 악령을 몰아내는 수호자가 된다. 문헌 속 공포의 대상이 지역 신앙과 축제 공연의 주역으로 바뀌어 온 것이다. 파괴적인 힘이 어떻게 공동체를 지키는 힘으로 받아들여지는지를 우시오니만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요괴도 드물다.
자세히 보기우시오니는 서일본의 해안이나 연못에 출몰하는 굴지의 흉악한 괴이로, 소의 머리에 오니의 몸, 혹은 거미의 몸에 소의 목 등 다양한 이형으로 그려진다. 헤이안 시대의 『마쿠라노소시(枕草子)』에서 '무서운 것'으로 지목될 만큼 예로부터 외경의 대상이 된 존재다.

와카야마에서는 각지의 연못이나 폭포에 우시오니 이야기가 전해지며, 그 성질은 땅마다 조금씩 다르다. 니시무로군의 우시오니후치는 바닥이 바다로 이어진다고 여겨졌으며, 연못의 물이 탁해지면 "우시오니가 있다"며 두려워했고, 해 질 녘에 나타나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병들게 하거나 미치게 한다고 한다. 스사미초(すさみ町) 고토의 폭포(琴の滝)에 사는 우시오니는 사람의 그림자를 핥고, 그림자를 핥힌 자는 얼마 안 가 죽는다고 전한다. 쿠시모토초(串本町) 사사노히라(笹の平)의 우시오니는 둔갑술이 뛰어나 아름다운 새의 모습으로 변해 사람을 홀리는데, 이것을 본 자는 병상에 누워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전해졌다. 고양이 같은 몸에 한 장(약 3미터)쯤 되는 꼬리를 가졌고, 몸이 공처럼 부드러워 걸어도 발소리가 나지 않는다고도 이야기된다[13]. 연못・폭포・바다라는 물의 경계에 나타나 그림자나 시선을 통해 목숨을 앗아가는 이 괴이는, 기이 해변 사람들이 품었던 수난과 풍토병에 대한 공포를 그대로 이형으로 응고시킨 것이었다.
기이의 우시오니 전승에서 흥미로운 것은 그것에 대항하는 주문이 남아 있다는 점이다. 조우했을 때 "돌은 흐르고 나뭇잎은 가라앉고, 소는 울부짖고 말은 으르렁거린다(石は流れる、木の葉は沈む、牛는 嘶く、馬는 吼える)"라며 온통 거꾸로 된 말을 외우면 목숨을 건진다고 한다. 이는 우시오니라는 존재의 이치를 반전의 언어로 교란하려는 해변 민초들의 절실한 방어 지혜였다[13].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해악의 괴이이면서도, 일단 제사로 모셔지면 축제 때 가마를 선도하고 악령을 물리치는 수호신으로 전락한다──우시오니의 이 양의성은 난폭하고 두려운 것일수록 강력한 수호신이 된다는 일본의 고료(御霊, 원령) 신앙 메커니즘을 그대로 체현하고 있다.
사귀의 반역──태평기의 오니와 와카의 힘
마지막으로 기이의 오니 이야기 중에서도 이색적인, 국가에 대한 반역을 다룬 이야기에 대해 짚고 넘어가고 싶다. 『태평기』 권16 「일본 조적의 일(日本朝敵事)」에 이름이 등장하는, 후지와라노 지카타(藤原千方)를 따르던 네 마리의 오니이다.

후지와라 치카타의 사귀(四鬼)
『태평기』 권16에 보이는, 후지와라 치카타를 따랐던 네 체의 귀신. 금귀는 병기가 통하지 않는 단단한 몸, 풍귀는 광풍을 일으키고, 수귀는 홍수를 일으키며, 은형귀는 모습과 기척을 숨겨 기습한다. 치카타는 사귀를 거느리고 조정에 맞섰으나, 토벌에 나선 기 노 아사오의 와카에 눌려 사귀가 물러나고 치카타는 멸망했다고 전한다. 지방 전승에는 화귀·토귀를 더해 헤아리는 이설도 있다.
자세히 보기후지와라노 지카타의 사귀는 제각기 초상적인 힘을 갖추고 있었다. 긴키(金鬼)는 어떤 무기도 튕겨내는 단단한 몸을 지녔고, 후키(風鬼)는 거센 바람을 일으켜 적을 날려버리며, 스이키(水鬼)는 어느 곳에서나 홍수를 일으켜 적을 익사시키고, 온교키(隠形鬼)는 기척을 지우고 기습을 가한다. 이 네 오니(四鬼)를 이끌고 지카타는 조정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힘이 미치는 이세(伊勢)와 이가(伊賀)에는 조정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14].
이에 조정은 기노 도모오(紀朝雄)에게 칙명을 내린다. 도모오가 "풀도 나무도 우리 대군의 나라이거늘 그 어디가 오니의 거처가 될 것인가(草も木もわが大君の国なればいづくか鬼のすみかなるべき)"라는 한 수의 와카를 읊어 오니들 사이에 던져 넣자, 사귀는 천벌을 두려워하며 사방으로 흩어져버렸다. 사귀를 잃은 지카타는 점차 세력을 잃고, 머지않아 도모오에게 토벌되었다고 전해진다[14]. 무력이 아닌 한 수의 와카가 오니를 퇴치한다는 이 결말은 말의 영적인 힘, 즉 언령(言霊, 고토다마)에 대한 신앙을 짙게 배어내고 있다.
사귀의 전승지는 이세와 이가를 중심으로 하지만 기이와의 인연도 얕지 않다. 미에현 미나미무로군 미하마초 오로시에는 '사귀의 굴(四鬼の窟)' 전설이 전해지며[14], 이는 쿠마노 산역과도 매우 가깝다. 훗날 사카노우에노 다무라마로(坂上田村麻呂)의 오니 퇴치 전설과도 접속하여 쿠마노 일대에 이 오니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금·풍·수·은형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지방에 따라서는 화귀(火鬼)·토귀(土鬼)를 꼽는 이설도 생겨났다.
기노 도모오의 와카 "풀도 나무도 우리 대군의 나라이거늘 그 어디가 오니의 거처가 될 것인가"는, 이 나라에 천황의 위광이 미치지 않는 땅 따위는 없으며 그러므로 오니가 살 곳 또한 있을 수 없다고 노래한다. 오니를 물리친 것이 검이 아니라 한 수의 노래였다는 결말은 말 그 자체에 영력이 깃들어 있다는 언령 신앙의 계보와 이어진다. 와카야말로 질서를 회복하는 힘이라는 발상은, 와카(和歌)의 이름을 짊어진 와카야마(和歌山) 땅에서 이야기되기에 참으로 어울리는 역설이기도 하다. 기이국이 쿠마노・고야라는 극치의 성(聖)을 품는 한편으로, 국가에 저항하는 오니의 그림자 또한 그 변경에 잉태하고 있었음을 이 이야기는 조용히 말해주고 있다.
쿠마노로 향하는 개미 행렬, 그 밤길에 우는 참새, 하테나시의 눈밭에 남겨진 외발 자국, 히다카가와를 건너는 뱀의 몸을 한 여자, 바다의 깊은 못에 숨어 있는 우시오니, 그리고 와카 한 수에 흩어지는 오니들──와카야마의 요괴는 양대 영장으로 향하는 '길'과 그 길에서 사람의 정이 괴이로 구르는 '변화'라는 두 가닥의 실로 엮여 있다. 성(聖)이 극에 달한 땅이기에, 이형(異形) 또한 가장 짙게 태어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