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타마현을 한 장의 지도처럼 펼쳐보면, 그 요괴 문화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두 지형 사이에 넓게 퍼져 있습니다. 서쪽 가장자리에는 해발 천 수백 미터에 달하는 오쿠지치부(奥秩父) 산괴가 솟아 있고, 동쪽으로 향하면 아라카와강과 도네강이 깎아낸 광활한 저지대와 간토 롬층으로 덮인 무사시노 대지가 끝없이 이어집니다. 산에는 산의 신이 있고, 평야에는 평야의 괴이가 존재합니다. 옛 구니(국) 이름인 무사시국(武蔵国) 중에서도 이 지역만큼 '수직적인 신앙'과 '수평적인 전승'이 뚜렷하게 나뉘는 곳은 드뭅니다.
그 수직축의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지치부 미쓰미네(三峯)의 늑대 신앙입니다. 미쓰미네 신사의 권속으로 숭배받는 오구치노마가미는 멸종된 일본늑대를 신격화한 존재로, 화재와 도난을 막고 빙의된 것을 떼어내는 영력을 지녔다고 여겨집니다. 한편, 대지와 저지대 쪽에는 밤길에서 올려다볼수록 거대해지는 뉴도(入道) 괴이나, 강가에서 팥을 씻는 소리의 주인공, 그리고 무사시의 지형 자체를 밟아 평평하게 만들었다는 거인의 발자국 전설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본고는 지치부의 산악 신앙을 뼈대로 삼고, 무사시노의 풍토와 가와고에의 성하마을(조카마치)이 키워낸 평야의 괴이까지 한 줄기로 되짚어보는 시도입니다.
사이타마라는 고장을 요괴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이곳이 단순한 '도쿄의 인접 현'이 아니라 무사시국이라는 오래된 틀의 기억을 서쪽 산속 깊이 간직한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다가 없는 이 내륙 현에서 신앙의 초점은 오로지 산과 강을 향했습니다. 비를 부르는 산, 짐승을 다스리는 산, 그리고 마을로 물을 보내는 강 ── 그 자연의 순환 속에 신인지 요괴인지 알 수 없는 존재들이 각자의 자리를 잡고 살아온 것입니다.
지치부 3사와 산신 ── 신견(오이누사마) 신앙의 정점
사이타마의 요괴 문화를 논하려면 먼저 서쪽 끝 지치부로 깊숙이 들어가야 합니다. 지치부 분지를 둘러싼 산들은 고대부터 산악 신앙의 영지였으며, 미쓰미네 신사·지치부 신사·호도산 신사의 '지치부 3사'가 그 핵심을 이룹니다. 그중에서도 해발 천 미터가 넘는 능선 위에 자리 잡은 지치부시 미쓰미네 신사는 일본 굴지의 늑대 신앙 성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쓰미네 신사의 전승에 따르면, 제12대 게이코 천황의 황자인 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가 동정(東征)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가이(甲斐)에서 오쿠지치부의 산들을 넘어 이곳에 올라 처음으로 사당을 모셨다고 합니다. 그때 길잡이 역할을 한 것이 산견(늑대)이었으며, 그 충직함과 용맹함 덕분에 권속으로 정해졌다고 전해집니다[1]. 이후 이 늑대는 단순한 동물이 아니라 신의 사자로 숭배받아 왔습니다.

오구치노마가미 (대구진신)
오구치노마가미(대구진신)는 일본늑대를 신격화한 산신으로, '오이누사마(개 신령님)' 또는 '고켄조쿠사마(어권속님)'라고도 불린다. '마가미(진신)'는 늑대의 옛 이름으로, 『만엽집』 제8권에 '큰 입의 진신 들판에 내리는 눈은(大口の真神の原にふる雪は)'이라고 읊어졌을 정도로 그 역사가 깊다. 야마토국 아스카 지역에는 마가미하라(真神原)의 늙은 늑대 전승이 남아 있는데, 사람을 잡아먹는 맹수을 향한 경외심이 신격화의 근원이었다. 무사시국 지치부의 깊은 산속에 자리한 미쓰미네 신사에서는 이 늑대를 주신의 사자(어권속)로 삼고,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선악을 분별하는 영수(霊獣)로 숭배한다. 화재, 도난, 마물, 빙의(憑きもの)를 물리치고 정화하는 힘이 있다고 여겨져, 근세 이후 간토 전역으로 신앙이 널리 퍼졌다.
자세히 보기권속의 정체는 오구치노마가미, 즉 신격화된 일본늑대입니다. 그 이름의 기원은 놀라울 정도로 오래되었습니다. 『만엽집(만요슈)』 제8권에 도네리노이라쓰메가 "오구치의 마가미 들판에 내리는 눈아, 너무 쏟아지지 마라, 머물 집도 없는데"라고 읊은 구절이 있어, 야마토국 아스카의 마가미 들판(真神原)[2]에 이미 늙은 늑대를 신격화한 '마가미(真神)'라는 이름이 등장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구치노마가미 신앙의 연원은 지치부 고유의 것이 아니라, 멀리 나라현의 아스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본 열도 규모의 오래된 신앙인 것입니다. 맹렬함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늙은 늑대가 이내 멧돼지와 사슴으로부터 농작물을 지키고, 사람의 선악을 꿰뚫어 보아 선인을 수호하고 악인을 징벌하는 성수로 승화해 나갔다고 여겨집니다[3].
전국적으로 퍼져 있던 마가미 신앙이 지치부라는 일본늑대의 실제 서식지에서 '권속 배차(御眷属拝借, 신의 사자를 빌려감)'라는 구체적인 의례와 결합하여 근세까지 살아남았다는 점, 이것이 미쓰미네 신앙의 특이점입니다. 오쿠지치부의 깊은 산은 메이지 말기에 멸종이 확인되기 전까지 일본늑대의 마지막 서식지 중 하나였으며, 사람들은 산속에서 진짜 늑대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그 짐승을 신의 사자로 숭배했습니다. 신화 속의 성수가 아니라 밤마다 짖어대는 실재하는 야생 동물이 신격을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미쓰미네의 늑대 신앙은 다른 어떤 요괴 신앙보다도 생생한 현실감을 지닙니다.

미쓰미네 신사의 오이누사마 신앙을 상징하는 것이 '권속 배차(오켄조쿠 하이샤쿠)'라는 독특한 의례입니다. 신찰(부적)에 깃든 권속을 1년 동안 집으로 모셔가 화재, 도난 등 온갖 재난을 막아주기를 기원하고, 이듬해에 다시 빌려오는 방식 ── 즉, 빌리고 갚는다는 신과 인간 사이의 대차 관계로 신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를 처음 시작한 인물은 교호 5년(1720)에 산에 들어온 닛코 호인(日光法印)으로 전해집니다. 산속에 암자를 짓고 지내던 그의 앞에 수많은 늑대가 나타난 광경에서 신탁을 느낀 그가, 멧돼지와 사슴을 쫓고 화재와 도둑을 막아주는 부적을 신도들에게 빌려준 것이 시초라고 합니다[1].
이 '빌려온다'는 발상은 요괴 신앙 중에서도 유독 실무적입니다. 수호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기한을 정해 빌린다는 감각에는, 신을 두려워하면서도 대등하게 거래하려 했던 근세의 합리성이 엿보입니다. 빌려온 권속을 함부로 다루면 앙화가 내린다고 여겼으며, 1년간의 임무를 마치면 정중하게 산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이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깃든 관계가 신앙이 형식적으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었습니다. 오이누사마는 '고신켄(御神犬)', '야마이누사마(山犬さま)'라고도 불렸으며, 밭을 망치는 해로운 짐승을 물리치고 집에 숨어드는 도둑을 막아주었을 뿐 아니라, 사람에게 씌운 여우나 너구리 같은 요물들을 떨쳐내는 '빙의 해제(憑きもの落とし)'의 영험함으로도 유명했습니다.
에도 시대 옛날부터 간토 전역에서 '고(講, 신앙 모임)'를 조직하여 미쓰미네를 참배하는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까닭은, 이러한 대차 방식의 도난 방지 부적이 실제로 효험이 있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특히 양잠과 밭농사를 생업으로 삼던 지치부와 무사시노 사람들에게, 늑대가 농작물을 망치는 멧돼지와 사슴을 내쫓아준다는 사실은 매일 겪는 현실이었기에 신앙과 실리는 하나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늑대를 신으로 삼는 발상은 사람과 짐승의 경계가 지금보다 훨씬 모호했던 시대, 산에 기대어 살아가던 이들의 절실한 세계관 그 자체입니다.
지치부 3사의 또 다른 축은 지치부 시가지의 총진수(총괄 수호신)인 지치부 신사에서 엿볼 수 있는 묘켄(妙見) 신앙입니다. 무사시국의 제4궁(四宮)으로 꼽히는 이 신사는 중세 시대에 북극성을 신격화한 묘켄 보살과 습합하여 '지치부 오미야 묘켄구(秩父大宮妙見宮)'로 번영했습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된 지치부 요마쓰리(밤축제)는 이 신사의 신체산(神体山)으로 여겨지는 부코산과 깊게 결부되어 있다고 전해집니다. 부코산에 자리한 남신(뱀신)과 묘켄구의 여신이 1년에 단 한 번 밀회를 갖는다는 전설이, 웅장한 수레(야타이) 장단과 겨울 불꽃놀이로 유명한 이 축제의 뿌리에 깔려 있으며, 산과 마을을 잇는 신혼(神婚) 이야기가 축제의 형태로 상연되어 온 것입니다.
해발 1,304미터의 부코산은 지치부 분지 남쪽에 병풍처럼 솟아 있어 예로부터 신이 깃든 산으로 우러러보았습니다. 비록 지금은 석회암 채굴로 산세가 크게 깎여나갔으나, 과거 그 북사면의 가파른 암벽은 기슭에서 올려다보는 이들에게 압도적인 신위(神威)를 느끼게 하던 신체산이었습니다. 산견을 권속으로 삼는 미쓰미네, 묘켄을 모시는 지치부, 그리고 신체산인 부코산 ── 이 셋이 포개어지는 곳에 사이타마 '수직적 신앙'의 두터움이 존재합니다. 요괴와 신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없는 이 산의 세계에서 두려움의 대상은 퇴치해야 할 적이 아니라 빌려오고, 제사 지내며,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이었습니다. 지치부의 요괴 문화가 장엄한 이유는 그 근원이 '모시는 신앙'에 있기 때문입니다.
무사시노의 밤길 ── 미코시뉴도와 아즈키아라이
지치부의 산을 지나 동쪽으로 내려가면 풍경이 확연히 달라집니다. 아라카와강이 실어온 충적지와 화산재가 퇴적된 무사시노 대지가 펼쳐지며, 잡목림과 밭, 그리고 그물망처럼 얽힌 작은 냇물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평야의 세계가 열립니다. 이곳에서 괴이의 무대는 산 정상에서 밤길과 물가로 옮겨갑니다. 산신이 수직으로 우뚝 서 있는 반면, 평야의 요괴는 사람들의 발길이 닿는 길목과 물길에 찰싹 달라붙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존재가 밤길에 나타나 사람을 내려다보는 뉴도(승려 모습의 요괴)입니다.
미코시뉴도는 밤길이나 비탈길이 끝나는 곳, 네거리나 돌다리 어귀에 승려의 모습으로 나타나며, 올려다보면 올려다볼수록 끝없이 커지는 요괴입니다. 그대로 계속 쳐다보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만, "미코시타(다 꿰뚫어보았다)"라고 먼저 말해버리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전해집니다. 올려다볼 정도로 크다 하여 미아게뉴도, 다카뉴도, 시다이다카, 노비아가리 등 각지에서 여러 이름으로 불렸으며, 사이타마를 포함한 간토 지방의 밤길 전설로 널리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문헌상으로는 엔포 5년(1677)에 출간된 괴담집 『슈쿠초쿠구사(宿直草)』[4]에 사냥 중이던 무사 앞에 이 요괴가 나타난 이야기가 실려 있고, 조쿄 3년(1686)의 『고금백물어평판(古今百物語評判)』[5]에서도 뉴도 형태의 요괴가 다루어집니다. 훗날 도리야마 세키엔이 『화도백귀야행(画図百鬼夜行)』[6]에서 이를 그림으로 그리면서 목이 긴 승려의 형상이 미코시뉴도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무사시노의 어두운 외길, 달빛조차 없는 밤에 등 뒤에서 서늘한 기척을 느끼는 ── 그러한 경험을 하나의 형태로 빚어낸 것이 바로 미코시뉴도입니다.
물가에 들러붙는 괴이로는 아즈키아라이가 있습니다. 강가나 다리 어귀에서 깊은 밤 "사각사각" 하고 팥을 씻는 듯한 소리를 내는 요괴로, 모습은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소리만으로 사람을 홀립니다. 지방에 따라서는 "팥을 씻을까, 사람을 잡아먹을까" 하고 노래 부른다고도 전해지며, 그 소리에 이끌려 물가로 다가간 사람이 발을 헛디뎌 물에 빠진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아즈키토기, 아즈키바카리라고도 불리며 간토에서 주부, 주고쿠 지방까지 널리 분포하는 전국적인 요괴입니다. 하지만 사이타마처럼 잔잔한 냇물과 골짜기가 많고 밤새 물소리가 끊이지 않는 고장에서는, 시냇물 소리나 바람에 나뭇잎이 부딪히는 소리가 사람의 귀에 '팥을 씻는 소리'로 들렸고, 그것이 곧 요괴로 결정화된 것입니다.
주목할 점은 아즈키아라이가 '형체가 없는 요괴'라는 사실입니다. 수많은 요괴가 기괴한 형상으로 묘사되는 데 반해, 아즈키아라이의 본체는 어디까지나 소리이며, 사람이 그 소리를 특정한 방식으로 해석한 결과로서만 존재합니다. 이는 어둠 속에서 청각만이 예민해져 미세한 물소리가 불안과 결합해 요괴로 변모하는, 인간의 지각 자체를 요괴화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미코시뉴도가 밤길의 시각적 괴이라면, 아즈키아라이는 물가의 청각적 괴이로서 이 둘은 무사시노의 짙은 어둠을 시각과 청각 양쪽에서 협공하고 있습니다. 산의 신앙이 웅장한 신격을 탄생시킨 것과 대조적으로, 평야의 요괴들은 사람의 불완전한 감각 그 자체에서 피어오른 존재인 것입니다.

이러한 괴이들의 공통점은 무찔러야 할 악귀가 아니라, 인간의 감각적 빈틈으로 스며드는 '기척의 요괴'라는 것입니다. 무사시노 대지에는 과거 끝을 알 수 없는 잡목림과 억새밭이 펼쳐져 있었고, 마을과 마을은 가느다란 외길로만 이어져 있었습니다. 가로등 하나 없던 시절, 달빛 없는 밤에 홀로 숲길을 걸을 때의 두려움, 등 뒤에서 문득 느껴지는 기척, 커져만 가는 불안감 ── 그러한 신체 감각 자체가 뉴도나 아즈키아라이라는 형태를 빌려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것입니다.
지치부의 산견이 장엄한 신격을 짊어진 반면, 평야 밤길의 요괴들은 그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사라집니다. "미코시타(꿰뚫어보았다)" 한마디에 물러가는 미코시뉴도처럼, 사람들은 요괴를 언어화하고 대처법을 강구함으로써 정체 모를 불안을 길들여 왔습니다. 요괴에게 이름과 약점을 부여하는 행위 자체가 어둠에 맞서는 인간의 소박한 저항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신을 섬기는 지치부의 신앙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생활에 밀착된 실천적인 전승의 지층이 드넓게 깔려 있습니다.
거인의 발자국 ── 다이다라봇치와 무사시의 지형
평야의 전승 중에서도 유독 규모가 큰 것이 거인 이야기입니다. 무사시노의 지형 그 자체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거인 ── 다이다라봇치의 발자국이 사이타마의 지명 곳곳에 새겨져 있습니다.

다이다라봇치
다이다라봇치는 간토와 주부 지방을 중심으로 널리 전해지는 거인 전설이다. 지역에 따라 다이다라봇치, 데이다라봇치, 데라봇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산을 짊어지고 다니며, 발을 디뎌 호수와 늪을 만들고, 바닷가의 조개를 먹고 껍데기를 쌓아 올린다고 전해지는, 그야말로 터무니없이 거대한 체구로 대지 자체를 만들었다고 일컬어지는 지형 기원의 거인이다. 『히타치국 풍토기』의 오쿠시노오카(大櫛岡) 편에는 언덕 위에 앉아 바닷가의 대합을 먹은 거인의 전승이 있는데, 그 발자국은 길이가 40여 보, 너비가 20여 보에 달하며, 먹다 남긴 조개껍데기가 언덕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는 다이다라봇치 계통 거인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여겨진다. 또한 『하리마국 풍토기』에서도 발자국이 늪이 되었다는 '오히토(大人)' 전승을 찾아볼 수 있다.
자세히 보기그 전형적인 예가 사이타마시 미나미구의 '다이타쿠보(太田窪)'입니다. 이는 '오타쿠보'가 아니라 '다이타쿠보'로 읽으며, 각지에 전해 내려오는 거인 '다이다보'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이다라봇치 전설에서는 연못이나 웅덩이, 늪과 같이 움푹 파인 지형을 거인의 발자국이나 넘어지면서 생긴 자국으로 설명합니다. 같은 미나미구에 있는 시라하타 늪은 예전에 고부시가이케(주먹 연못)라 불렸는데, 비 오는 날 거인이 발을 미끄러뜨려 넘어지면서 주먹을 짚은 곳이 움푹 파여 생긴 늪이라고 전해졌습니다. 지형의 기복을 거인의 신체 흔적으로 읽어내는 전형적인 지명 전설입니다.
지명 표기 자체에도 고증할 여지가 있습니다. 옛 다이타쿠보 마을(太田窪村)은 본래 '오타쿠보 마을(大田窪村)'이라 쓰는 것이 맞으나, 『무사시국 군촌지(武蔵国郡村誌)』[7]에 따르면 덴포 8년(1837) 대관소에서 작성한 연공 목록에 실수로 '太(클 태)' 자로 기입되었고, 이후 그 표기로 굳어졌다고 합니다. '다이타'라는 소리에 본래 '大(큰 대)' 자를 썼던 흔적이 여기에 남아 있습니다.

이 다이다라봇치 전설에 학술적 빛을 비춘 이가 야나기타 구니오입니다. 야나기타는 쇼와 2년(1927) 『중앙공론』에 「다이다라보의 발자국」[8]을 발표하여 전국에서 수집한 거인 설화를 고찰했습니다. 그 서두에서 "도쿄시는 우리 일본 거인 전설의 한 중심지라 할 수 있다"고 언급하며, 옛사람들이 이 하늘 아래를 동서남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던 거인의 모습을 상상했었다고 설명합니다. 무사시노를 포함한 간토 평야는 실로 그러한 거인 전설이 짙게 분포하는 지역에 해당합니다.
다이다라봇치는 '大太法師(다이타호시)'라고도 쓰이며, 다이다라보, 다이다라보시 등 지방마다 부르는 이름이 다릅니다. 후지산이나 쓰쿠바산을 등에 짊어지고 날랐다거나 간토 평야의 흙을 파낸 자리가 호수가 되었다는 등 거대한 스케일의 지형 창세 전설이 각지에 전해지지만, 사이타마 다이타쿠보처럼 조그만 웅덩이나 늪을 거인의 발자국이나 넘어진 자국으로 이야기하는 소규모 지명 설화 역시 그 전승군의 분명한 일부입니다. 야나기타는 이러한 거인 신앙이 본래 국토를 창조한 신에 대한 신앙이 점차 영락(零落)하여 남은 흔적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즈모의 구니비키(국토 끌어오기) 신화 속 신이 밧줄로 땅을 끌어당긴 것처럼, 무사시의 거인 또한 대지와 저지대라는 지형의 유래를 설명하기 위한 '구니쓰쿠리(국토 창세)'의 기억을 짊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여기서 사이타마 요괴 문화를 관통하는 구도가 다시 한번 뚜렷이 나타납니다. 지치부의 산견이 아스카 시대 이래의 고대 신앙을 산속이라는 현장에 온전히 보존한 것처럼, 다이타쿠보의 지명은 국토를 다듬은 거인 신앙을 평야의 언어 속에 화석처럼 간직하고 있습니다. 산에서는 신앙이 '제사 지내는 대상'으로 살아 숨 쉬고, 평야에서는 신앙이 '지명과 언어'로 남았습니다 ── 형태와 매체는 다를지언정, 두 가지 모두 오래된 신앙의 퇴적층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무사시노를 걷는 이들은 지명 하나하나에 깃든, 눈에 보이지 않는 거인의 발자국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가와고에 조카마치와 옷페강의 갓파들
평야의 요괴 지층을 한 겹 더 파고 내려가면, 사람들의 삶 바로 곁에 머무는 물의 요괴, '갓파'의 영역에 다다르게 됩니다. 사이타마에 갓파 전승이 짙게 배어 있는 이유는 아라카와강, 이루마강, 옷페강, 도네강 같은 강줄기가 그물망처럼 얽혀 있어 농업과 수운 등 수변 생활이 몹시 밀착된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심지 중 하나가 가와고에를 아우르는 일대입니다. 가와고에는 초로쿠 원년(1457) 오기가야쓰 우에스기씨가 오타 도시나카, 도칸 부자에게 축성하게 한 가와고에성의 조카마치(성하마을)로 발전했으며, 일본 3대 기습전 중 하나인 '가와고에 야전'의 무대가 되기도 한 무사시 굴지의 요충지였습니다. 덴분 15년(1546), 호조 우지야스가 압도적인 병력 차이를 뒤집고 우에스기·아시카가 연합군을 야습으로 격파한 이 전투는 무사시의 패권을 간토 간레이 가문에서 고호조씨로 넘긴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숱한 전란의 기억이 겹겹이 쌓인 이 땅은 에도 시대에 이르러 가와고에 번의 조카마치로 번영했고, 신가시강의 수운을 통해 에도와 연결되며 물자의 집산지로 자리 잡았습니다. 오늘날에도 '고에도(작은 에도)'라 불리는 구라즈쿠리(전통 창고 건축) 거리가 남아 있으며, 동일본에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혼마루 어전이 그 역사의 숨결을 전하고 있습니다.
조카마치라는 밀도 높은 인간 생활의 가장자리, 그 성하마을을 적시는 강가에 비로소 물의 요괴가 깃들었습니다. 가와고에시와 히키군 가와지마정의 경계를 흐르는 옷페강 오치아이 다리 부근에 사이타마에서 가장 유명한 갓파가 산다고 전해집니다.

이가사의 가사승
사이타마현 가와지마초 이가사에 전해지는 캇파. 승려처럼 가사를 걸친 모습이라 하여 이름이 붙었다. 밤늦게 오치아이바시 부근에서 길 가는 이를 불러 세우고, 거구로 변해 길을 막거나 손수레 뒤에 매달려 무겁게 만드는 장난을 쳤다. 인근의 캇파들이 중원에 인간의 창자를 바쳤다는 섬뜩한 전승도 남아 있으며, 주변의 ‘다케보’나 ‘코지로’ 같은 캇파들과의 연계가 전해진다.
자세히 보기가와지마정 이구사에 전해지는 이구사의 케사보는 승려처럼 가사(袈裟)를 두른 모습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은 갓파입니다. 밤늦게 오치아이 다리 근처를 지날 때면 "어이"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뒤돌아보면 가사를 걸친 커다란 사내가 버티고 서 있다고 합니다. 수레를 끌고 가면 뒤에 달라붙어 무겁게 만드는 ── 그런 장난을 즐겼다고 전해집니다. 주변의 갓파들은 1년에 한 번 인간의 내장을 백중(추석) 선물로 케사보에게 바쳤다는 끔찍한 전승도 남아 있어, 갓파 사회 내에서 케사보가 일종의 우두머리 격이었음을 짐작게 합니다.

케사보가 흥미로운 이유는 홀로 고립된 괴이가 아니라 갓파들의 끈끈한 교류망 속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사이의 다케보, 고아제의 고지로(곤야의 고지로), 고누마의 가지보 등 이웃 갓파들과 사이가 좋았다고 전해지며, 도코로자와시 지묘인 만다라 연못에 사는 갓파와는 부부지간이었다고도 합니다. 게다가 이시자카 주로 연못의 갓파, 옷페 사이조 연못의 갓파, 그리고 이구사의 케사보 이 셋은 '옷페강 3대 갓파'로 나란히 일컬어졌습니다[9]. 도코로자와 만다라 연못의 갓파가 습격한 아이의 내장을 다케보와 케사보에게 선물로 보냈다는 전승까지 남아 있어, 갓파들끼리의 증여 관계마저 꽤 상세히 묘사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강이라는 선으로 이어진 물가 취락마다 갓파의 터줏대감이 존재하고, 그들이 서로 친척이나 우정, 혹은 증여로 맺어져 있다는 것 ── 이는 곧 강을 매개로 교역하고 혼인을 맺었던 사람들의 생활권 지도를 갓파의 세계에 고스란히 투영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옷페강, 이루마강, 고아제강이라는 물줄기가 바로 갓파 사회의 길목이기도 했던 셈입니다. 갓파는 수난(水難)에 대한 두려움의 결정체인 동시에 수변 공동체의 인연을 말해주는 존재이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강에 빠져 익사하는 사고를 두고 "케사보에게 끌려갔다"고 말하는 것은, 비극에 나름의 설명을 부여함과 동시에 강가에 함부로 다가가지 말라는 생활 속의 경고를 전하는 역할도 수행했습니다. 요괴는 공동체가 자연의 위험과 타협하기 위해 빚어낸 일종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산과 평야를 잇는 것 ── 사이타마 요괴의 지세
지금까지 되짚어본 사이타마의 요괴 무리는 언뜻 제각각인 듯 보이지만, 실은 '지형'이라는 한 줄기 실로 꿰어져 있습니다. 서쪽 끝 오쿠지치부에서는 일본늑대라는 실재하는 짐승이 오구치노마가미라는 신격을 부여받았고, 권속 배차(빌려오기)라는 대차 방식의 신앙으로서 근세까지 살아 숨 쉬었습니다. 지치부 3사와 부코산이 만들어내는 산악 신앙의 자장은 간토 전역에서 참배객들을 빨아들이는 수직적 중심이었습니다.
한편 동쪽으로 끝없이 펼쳐진 무사시노 대지와 아라카와강·도네강 저지대에서는, 괴이가 마치 땅을 기어가듯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착 달라붙었습니다. 밤길의 미코시뉴도, 물가의 아즈키아라이는 시각과 청각의 빈틈을 파고드는 기척의 요괴로, 무찔러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이름을 붙이고 정체를 맞힘으로써 통제하려 했던 일상적 지혜의 산물이었습니다. 다이타쿠보의 다이다라봇치는 대지와 저지대라는 지형의 유래 자체를 거인의 육체에 의탁한 국토 창세의 기억이며, 가와고에와 옷페강의 케사보들은 강을 축으로 한 공동체의 인연을 갓파의 교류망으로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이었습니다.
산에는 수직으로 우뚝 선 신이 있고 평야에는 수평으로 넓게 퍼진 요괴가 있습니다. 지치부의 성수 신앙과 무사시노의 생활형 괴이 ── 이러한 뚜렷한 고저 차이야말로 사이타마현의 요괴 문화를 다른 간토 지역과 구별 짓는 최대의 개성입니다. 바다와 접한 지바나 가나가와가 바다의 요괴를 품고, 에도의 도시적 속성을 물려받은 도쿄가 혼조 7대 불가사의 같은 도심 속 괴담을 키워낸 것에 반해, 내륙지방인 사이타마는 산과 강이라는 자연의 세로축을 따라 괴이를 촘촘히 배치해 왔습니다.
게다가 이 산과 평야는 결코 단절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치부의 산비탈에 내린 비는 아라카와강이 되어 무사시노를 꿰뚫고, 이루마강과 옷페강을 거쳐 저지대를 적신 뒤 이내 도네강 수계로 흘러듭니다. 오이누사마가 지켜주는 산의 농작물도, 다이다라봇치가 평평하게 밟아 다진 대지의 밭도, 케사보가 사는 강의 물도 모두 거대한 물의 순환 속에 속해 있습니다. 산의 신이 비를 내리고 물의 요괴가 물을 다스리며 평야의 요괴가 땅과 길에 머무는 것 ── 사이타마의 요괴들은 이 물과 땅의 순환 고리를 각자의 위치에서 묵묵히 이야기해 주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오이누사마의 부적을 빌려 집안을 지키고, 밤길에서는 뉴도의 정체를 꿰뚫어보며, 강가에서는 아즈키아라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지명 속에서 거인의 흔적을 읽어냅니다. 산과 평야 사이를 오가던 사람들의 감각의 총체가 이 사이타마현의 괴이 지도를 그려왔습니다. 바다 없는 무사시국에 이토록 풍요로운 괴이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사실은, 사람들이 이 땅의 자연과 어떻게 마주하며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그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인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