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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zaifu 学者が果てた地 ── 大宰府と菅原道真

菅原道真·怨霊·飛梅·御神牛。天神信仰のもう一つの中心

学者が果てた地 ── 大宰府と菅原道真

Dazaifu · だざい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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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都の北野天満宮が、雷神となった道真の怨霊を鎮めるために建てられた社であるなら、福岡の大宰府は、その道真がこの世の生を終えた、終焉の地である。学問の神「天神さま」として全国に祀られる菅原道真 ── その信仰の源は、彼が失意のうちに果てた、この地にある。

そして驚くべきことに、太宰府天満宮の本殿は、道真の墓所の真上に建っている。怨霊として恐れられた人が、いかにして学問の神となったのか。本稿は、道真の生が果てたこの地から、天神信仰のもう一つの中心をたどる。

墓所の上に建つ宮

全国に約一万二千社あるといわれる天満宮·天神社の総本宮の一つが、福岡の太宰府天満宮である。その最大の特徴は、社殿そのものが菅原道真の墓所の上に建てられている点にある。

道真の死後、味酒安行(うまさけのやすゆき)が延喜5年(905年)に廟を建立し、のちの延喜19年(919年)、醍醐天皇の勅を奉じた藤原仲平が、道真の墓所の上に社殿を造営した。これが太宰府天満宮の創祀である。太宰府天満宮は、京都の北野天満宮とともに全国の天満宮の総本宮とされ、「天神さま」信仰の中心として、千年以上にわたり篤い崇敬を集めてきた。怨霊として都を畏れさせた道真を、その亡骸の眠る地に手厚く祀る ── 鎮魂の祈りが、この社の出発点であった。

左遷、
そして終焉

道真がなぜこの地で果てたのか。それを語るには、彼の生涯の最後の転落にさかのぼらねばならない。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すがわらのみちざね

스가와라노 미치자네는 헤이안 시대의 학자이자 한시인으로, 우대신까지 오른 정치가다. 그가 죽은 뒤에는 일본에서 가장 두려워한 원령의 하나로 여겨졌고, 이윽고 학문의 신 “텐만텐진”으로 전국에 모셔졌다. 학문의 가문 스가와라 씨에서 태어나 우다·다이고 두 조정에서 중용되었으나, 쇼타이 4년(901) 좌대신 후지와라노 도키히라의 참언으로 다자이후로 좌천되어, 엔기 3년(903) 실의 속에 그곳에서 죽었다. 미치자네가 죽은 뒤 도읍에서는 도키히라를 비롯한 정적들이 잇따라 죽고, 역병과 가뭄이 이어졌으며, 사람들은 이를 무고한 죄에 잠긴 미치자네의 재앙이라 수군거렸다. 그중에서도 엔초 8년(930), 궁중 세이료덴에 벼락이 떨어져 공경에 사상자가 많이 난 사건은, 미치자네를 우레를 부리는 “가라이텐진(火雷天神)”으로 보는 관념을 확정지었다. 조정은 그 사나운 영을 가라앉히려 신으로 모셨고, 교토의 기타노 텐만구와 묘소에 세워진 다자이후 텐만구를 중심으로 텐진 신앙이 퍼져 나갔다. 처음에는 재앙을 내리는 신으로 두려워했던 텐진은, 미치자네가 생전에 보인 빼어난 학식 덕분에 점차 학문과 시문의 수호신으로 성격을 바꾸었고, 근세에는 데라코야의 보급과 함께 학업 성취와 누명을 벗겨 주는 신으로서 서민에게까지 친숙해졌다. 생전에 더없이 사랑한 매화와, 원령으로서 부린 우레가 그 상징으로 오늘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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宇多·醍醐両天皇の信任を得て右大臣にまで昇りつめた道真は、学者の家の出としては破格の出世を遂げた。道真は代々学問をもって朝廷に仕えた菅原家に生まれ、若くしてその学才を認められた人物である。家柄ではなく学問の力で高位にまで昇ったその経歴は、当時としては例外中の例外であった。それゆえに、彼の突然の失脚は、多くの人の記憶に深く刻まれることになる。だがその栄達は、旧来の貴族たちの反感を買う。昌泰4年(901年)、道真は「斉世(ときよ)親王を皇位に就けようと謀った」という罪を着せられ、大宰員外帥(だざいごんのそち)に左遷された。これが「昌泰の変」である。左大臣·藤原時平の讒言とされるが、その背後には、道真の急速な台頭をこころよく思わない貴族層の同意があったとも指摘される。

大宰府での道真の暮らしは、惨憺たるものであった。配所は大宰府政庁の南にあった荒れ放題の廃屋で、給与も従者も与えられなかったという。失意と困窮のうちに、道真は延喜3年(903年)2月25日、大宰府で薨去した。享年59。都を追われてわずか二年後のことであった。漢詩の名手として知られた道真は、この廃屋でも京を思う詩を詠んで日々を過ごしたと伝わる。栄華をきわめた右大臣の、あまりにも惨めな晩年であった。その無念の深さこそが、のちに人々が彼の怨霊を畏れた理由でもあった。

牛車は動かなかった

太宰府天満宮の境内には、横たわった牛の像 ──「御神牛(ごしんぎゅう)」が置かれている。参拝者が頭を撫でて知恵を授かると信じられ、いつも多くの手で磨かれて光っている。この牛は、道真の埋葬にまつわる、ある不思議な出来事に由来する。

道真の遺骸を牛車に乗せて葬地へ運ぼうとしたところ、その牛車が門前で動かなくなった。人々はこれを「この地に留まりたい」という道真の遺志と受け止め、その場所を墓所と定めた。動かぬ牛が示した場所 ── それが、今の本殿の建つ地である。御神牛は、道真とこの地を結びつけた、その牛の記憶をとどめている。今日では、御神牛の頭を撫でれば知恵を授かり、体の悪いところと同じ部位を撫でれば快癒するとも信じられ、参拝者にとって最も親しい存在でありつづけている。

怨霊から天神へ

道真の死は、それで終わりではなかった。むしろ、ここから天神信仰の壮大な物語が始まる。

원령

onryō

원령은 비명에 가까운 죽음이나 깊은 원한을 품은 이의 혼, 혹은 강한 원념을 지닌 생령이 화를 일으키는 존재를 가리킨다. 고대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역병·천변·정변 같은 재앙의 원인으로 여겨졌으며, ‘오령(御霊)’으로 신사와 사찰에 모셔 달래는 신앙이 널리 퍼졌다. 역사상 개별 이름을 지닌 인물의 혼이 꺼림칙한 힘과 경외를 함께 지닌 사례가 많아, 두려움과 제사가 한 짝을 이루는 이야기로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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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真の死後、都ではさまざまな凶事が相次いだ。延長8年(930年)には、朝議のさなかに清涼殿に落雷があり、藤原清貫ら朝廷の要人に多くの死傷者が出た ── いわゆる「清涼殿落雷事件」である。人々はこれらの災厄を、無実の罪で死んだ道真の怨霊のしわざと恐れた。雷を操る怨霊は、やがて天の神「天神」と同一視され、畏怖の対象から信仰の対象へと転じていく。無実の罪で死んだ者の霊が祟りをなすという考えは「御霊(ごりょう)信仰」と呼ばれ、平安時代の人々の心を強くとらえていた。道真の天神信仰は、その御霊信仰の、最も大きな結実であった。

この怨霊を鎮めるために京都に建てられたのが、北野天満宮である。終焉の地·大宰府と、鎮魂の地·北野 ── 天神信仰は、この二つの社を中心に、全国へと広がっていった。道真の生涯を京の側からたどる物語は、北野天満宮に詳しい。

飛梅と、
学問の神

太宰府天満宮を語るうえで欠かせないのが、「飛梅(とびうめ)」の伝説である。

道真は梅をことのほか愛したと伝わる。京を去るにあたり、道真は庭の梅に向かって「東風(こち)吹かば/にほひおこせよ/梅の花/あるじなしとて/春な忘れそ」と詠んだ。主を慕ったその梅が、一夜のうちに京から大宰府へと飛んできた ── それが飛梅である。今も拝殿のかたわらに立つこの梅は、境内で最も早く花を咲かせるという。飛梅をはじめ、太宰府天満宮の境内には数多くの梅が植えられ、早春には一面が花の香りに包まれる。梅は道真を象徴する花として、全国の天満宮に欠かせないものとなった。

怨霊として恐れられた道真は、時を経て、その卓越した学識ゆえに「学問の神」として親しまれるようになった。現在の本殿は、天正19年(1591年)に小早川隆景によって再建されたものである。受験を控えた学生をはじめ、年間を通じて多くの参拝者が、合格や学業成就を祈ってこの地を訪れる。

天神信仰の、
もう一つの中心

雷神となった怨霊を鎮める京都の北野天満宮に対し、大宰府は、その怨霊が生身の人として果てた、終焉と墓所の地である。怨霊鎮魂の社と、終焉の地の社 ── 性格を異にする二つの中心が、道真をめぐる信仰を支えてきた。

無実の罪で都を追われ、廃屋で息を引き取った一人の学者。その悲運の死が、千年を越えて全国一万二千社の天神信仰を生んだ。動かぬ牛が定めた墓所の上に、今日も人々の祈りが絶えない。とりわけ受験の季節には、合格を願う学生とその家族で境内がにぎわう。怨霊として畏れられた一人の人が、千年の時を経て、人々が最も身近に手を合わせる「学問の神さま」となった ── 太宰府は、その変転のすべてを見つめてきた地である。福岡の妖怪や信仰の全体像については福岡県の妖怪事典も併せて読まれ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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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신격

    すがわらのみちざね

    텐만 다이지자이 텐진·미치자네

    신령·신격교토시 기타노 텐만구·다자이후 텐만구 (스가와라노 미치자네의 어령)

    이 판에서는 한 문인이 어떻게 우레의 신이 되고, 다시 학문의 신으로 바뀌었는지——그 두 차례의 변신을, 연대와 도상에 따라 철저히 좇는다. 미치자네의 원령화는 죽은 직후에 시작된 것이 아니다. 엔기 8년(908) 옛 문하 후지와라노 스가네가, 이듬해 엔기 9년(909) 좌천의 장본인 후지와라노 도키히라가 서른아홉에 죽었고, 엔기 23년(923)에는 황태자 야스아키라 친왕이 훙했다. 조정은 그해 미치자네를 우대신으로 복위시키고 정이위를 추증하여 죄를 풀었으나, 재앙은 멎지 않았고, 엔초 3년(925)에는 다음 황태자 요시요리 왕마저 다섯 살에 세상을 떠났다. 이런 죽음의 연쇄가 무고한 미치자네의 재앙으로 도읍 사람들에게 의식되어 간 과정이야말로 어령 신앙의 생성 그 자체다. 그 정점이 엔초 8년(930)의 세이료덴 낙뢰였다. 기우 의논이 한창일 때 궁중을 친 우레는, 다자이후에서 미치자네를 감시한 후지와라노 기요쓰라를 즉사시키고, 자리에 있던 공경을 차례차례 태웠다. 우레=미치자네의 의지라는 해석은 여기서 결정적이 되었고, 영은 단순한 원령을 넘어 우레를 다스리는 “가라이텐진” “텐만 다이지자이 텐진” “일본 다이조 이토쿠텐”이라 일컬어지는 두려운 신격으로 승화했다. 가마쿠라 시대의 『기타노 텐진 연기 그림두루마리』는 이 우레의 신이 되는 장면을 두루마리의 백미로 그렸고, 우레구름을 모는 텐진의 상은 훗날 다와라야 소타쓰 등의 풍신뇌신도에까지 그림자를 드리웠다. 텐진의 도상에는 대조적인 두 계통이 있다. 하나는 연기 그림두루마리가 그리는 사나운 가라이텐진, 우레구름을 타고 우레를 놓는 모습. 또 하나는 의관속대에 홀을 잡고 곁에 매화를 둔 단정한 문인 관료의 상으로, 이것이 학문신으로서의 표준상이 되었다. 중국풍 옷을 입고 자루를 메고 매화 한 가지를 든 “도토 텐진(渡唐天神)”은, 미치자네가 하룻밤 사이에 송나라 선승에게 건너가 가르침을 받았다는 선림의 설화에 바탕한 변종이다. 원령에서 학문신으로의 무게 이동은 완만히 나아갔다. 헤이안 중기에는 이미 시문과 정직을 맡은 자비의 신으로 제문에 칭송되었고, 쇼랴쿠 4년(993)에는 정일위·태정대신이 추증되어 명예가 온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학업 성취의 신으로서 서민에 자리 잡은 것은 훨씬 뒤, 에도 시대에 데라코야의 보급과 함께 찾아온다. 빼어난 학자였던 미치자네의 생전 모습이 글씨 익히는 자리에 걸렸고, 읽고 쓰기와 학문의 수호신으로서 텐진은 우레의 신의 두려움을 벗고 전국의 텐만구로 퍼져 나갔다.

  • 원령

    원령

    전설

    onryō

    오음신앙

    유령망령일본 각지

    원령을 오음으로 모셔 화를 누그러뜨리고 복덕으로 전환한다는 틀. 역병과 천재는 원한의 발로로 보았고, 사전 창건, 신격 부여, 제례의 상례화를 통해 화해를 도모했다. 신벌의 신은 두려움과 숭경이 겹친 양면성을 지니며, 거친 힘은 진혼의 작법을 통해 공동체의 수호로 변용된다고 여겨졌다. 국가적 의례에서 마을의 공양까지 층위적으로 시행되어, 개원, 칙사의 파견, 오음회, 방생회 등이 제도화되었다. 개인에게는 회향, 사경, 염불, 가피기도가 베풀어졌고, 명예 회복과 신계 부여가 영의 울적함을 푸는 방편으로 여겨졌다. 이야기와 연기는 왜 원한이 생겼는지 설하며, 원통함, 비명, 단절과 같은 원인을 사회적 기억의 장으로 남기는 역할을 맡는다. 원령의 힘은 무차별이 아니라 인유에 따라 징조를 보인다고 하여, 몽고, 신탁, 뇌화, 역려 등의 징으로 의사를 표한다고 믿었다. 진혼은 일회로 끝나지 않고, 연례 제례와 사두 정비로 계속되며, 망각이 재발을 부른다고 경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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