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daうだ

Uda에 전해지는 요괴 2가지. 이 땅에 뿌리내린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다른 이름: 宇陀郡 / 宇陀市
  • 야타가라스

    야타가라스

    신격

    yatagarasu

    쿠마노에서 야마토로 이끄는 영조·야타가라스

    신령·신격쿠마노 혼구 타이샤·쿠마노 산잔 (현 와카야마현) / 야마토국 우다 (현 나라현)

    이 판본에서는 야타가라스를 '길을 여는 신의 사자'로 읽는다. 야타가라스는 적을 쓰러뜨리는 무신이 아니라,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를 보여주는 존재이다. 진무 동정의 이야기에서 일행이 쿠마노의 산길에서 길을 잃었을 때, 천상의 신은 군세를 늘려주는 대신 까마귀 한 마리를 보낸다. 여기에 이 영조의 본질이 있다. 힘이 아닌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야타가라스의 신덕인 것이다. 기키(記紀)에서의 야타가라스는 지리와 정통성을 동시에 연결한다. 쿠마노에서 야마토로 들어가는 길은 단순한 산길이 아니라, 새로운 왕권이 성립하기 위해 넘어야만 하는 경계이다. 『고사기』에서 까마귀가 선도하는 장면은 산속의 진로를 보여줄 뿐만 아니라, 진무의 발걸음이 신들에게 승인받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새가 날아가는 방향이 그대로 정치적인 진로가 된다. 발이 세 개인 도상은 야타가라스에 대한 후세의 이해를 크게 넓혔다. 삼족오는 동아시아의 태양조 관념과 겹치며 일본의 야타가라스에게도 태양, 방위, 하늘의 질서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단, 기키의 본문에서 가장 강한 것은 '세 개의 발'보다 '인도'이다. 이 판본에서는 도상의 화려함에 너무 기대지 않고, 어두운 산길에서 앞서 날아가는 검은 새라는 원초적인 감각을 중심에 둔다. 쿠마노 신앙 속에서 야타가라스는 신의 사자로서 구체적인 신앙의 터전을 얻었다. 쿠마노 고오 호인의 까마귀 문자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서약과 부적의 힘을 지니는 기호이다. 까마귀는 사체를 쪼아먹는 불길한 새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신의 말씀을 전하는 새가 되기도 한다. 이 양의성(両義性)이 야타가라스를 그저 밝은 승리의 마크로만 두지 않는다. 검은 새가 성스러운 안내자가 되는 지점에 쿠마노의 산과 신화의 깊이가 있다. 현대의 야타가라스상은 스포츠의 승리나 팀의 진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도 읽힌다. 하지만 그 뿌리에 있는 것은, 길을 잃은 자가 혼자서는 나아갈 수 없을 때 전방에 하나의 이정표가 나타난다는 경험이다. 이 판본의 야타가라스는 답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앞서 날아갈 뿐이다. 따를지 말지는 인간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 이 판본에서는 야타가라스의 '검은색'에도 주목하고 싶다. 까마귀는 종종 불길한 새로 여겨지지만, 쿠마노의 문맥에서는 신의 사자가 된다. 불길함과 신성함이 반전되는 곳에 산악 신앙의 깊이가 있다. 어두운 산길에서 검은 새를 놓치지 않고 나아가는 것은 어둠 속에서 신의 뜻을 읽어내는 것과 가깝다. 또한, 야타가라스는 말을 많이 하지 않는 인도자이다. 사루타히코처럼 신으로서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새로서 앞서 날아간다. 사람은 그 날아가는 방향을 해석하고 자신의 발로 나아가야 한다. 인도는 강제가 아니라 독해를 요구한다. 그 점이 야타가라스의 조용한 엄격함이다. 발이 세 개인 도상이나 축구 엠블럼이 널리 알려진 현재에도 이 영조의 뿌리는 쿠마노에서 야마토로 빠져나가는 신화적인 산길에 있다. 화려한 상징의 껍질을 벗겨내면 마지막에 남는 것은, 길을 잃은 일행의 앞을 날아가는 한 마리의 큰 까마귀이다. 그 단순한 장면이야말로 야타가라스의 가장 강렬한 이미지이다. 그렇기에 야타가라스는 목적지 그 자체가 아니라, 목적지를 향해 가기 위한 신뢰를 상징한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먼저 나아갈 방향을 믿어야 한다. 검은 새의 선도는 그 신뢰를 형태화한 신화적인 몸짓인 것이다.

  • 베토베토산 (Betobeto-san)

    베토베토산 (Betobeto-san)

    에픽

    betobeto-san

    밤길에 이어지는 발소리

    산야의 괴이야마토국 우다군 (현 나라현 우다시 주변) / 시즈오카현

    이 판본에서는 베토베토산을 '모습 없는 발소리의 동행자'로 파악한다. 보이지 않는 요괴는 많지만, 베토베토산처럼 소리의 거리감만으로 성립하는 요괴는 드물다. 발소리는 등 뒤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결코 따라잡지 않는다. 뒤돌아보면 사라지고, 걷기 시작하면 다시 시작된다. 이 반복을 통해 걷는 자는 '나 혼자가 아니다'라는 감각을 증명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채로 계속 안고 가게 된다. 이 요괴의 무대가 '길'이라는 점은 중요하다. 집 안의 괴음이라면 방이나 천장의 괴이가 되겠지만, 베토베토산은 이동 중인 신체에 달라붙는다. 밤길에서 사람은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등 뒤를 계속 확인할 수는 없다. 그곳에 발소리가 생기면 공포는 시야 바깥쪽에 고정된다. 등 뒤의 소리는 인간의 신체가 가장 확인하기 어려운 곳에서 다가오기 때문에, 모습을 가진 괴이보다 지속적인 불안을 낳는다. "먼저 가시지요"라는 말은 이 판본의 핵심적인 대처법이다. 베토베토산은 퇴치되는 것이 아니라 통행의 순서를 양보받는다. 이 발상은 요괴를 적으로서가 아니라 길에서 만나는 상대로 대하는 민속적 태도를 비춘다. 말을 건넴으로써 보이지 않는 발소리는 등 뒤의 위협에서 앞서가는 동행자로 변한다. 공포의 위치를 바꾸는 것이야말로 이 요괴에 대한 최선의 대처인 것이다. 미즈키 시게루의 도상화는 무형의 소리를 친근한 요괴로 변환시켰다. 모자를 쓴 작은 그림자 같은 모습은 아이들도 기억하기 쉬웠고, 캐릭터로서의 베토베토산을 널리 알렸다. 하지만 이 판본에서는 그림보다 소리에 무게를 둔다. 둥근 모습을 보고 안심해 버린다면 베토베토산 본래의 힘은 반감된다. 그는 보이지 않기 때문에 듣는 자의 상상 속에서 늘어나고 줄어든다. 베토베토산은 위해가 적은 요괴이면서도 고독한 보행을 변질시킨다. 아무도 없어야 할 길에 자신의 보폭을 모방하는 다른 리듬이 겹쳐진다. 그 소리를 무시하면 등 뒤에 남고, 인정하고 양보하면 앞으로 이동한다. 즉 이 괴이는 보이지 않는 것과 함께 길을 걷기 위한 최소한의 민속적 매너를 가르쳐 주고 있다. 이 판본에서는 발소리를 '타자의 기척'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안의 메아리'로도 읽는다. 베토베토산의 소리는 밖에서 오는 것 같으면서도 자신의 보행과 완전히 동기화된다. 완전히 타자라면 거리가 변해야 하지만 계속 같은 간격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듣는 자는 외부의 괴이와 내부의 불안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먼저 가시지요"라는 말은 외부의 요괴를 향한 인사이자 자신의 불안을 앞으로 덜어내는 몸짓이기도 하다. 등 뒤에 달라붙은 것을 앞으로 옮김으로써 사람은 비로소 계속 걸을 수 있다. 베토베토산은 퇴치해야 할 요괴가 아니라 걷는 자의 심신 리듬을 재조정하는 요괴인 것이다. 이 판본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길을 양보한다는 작은 윤리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시하고 억지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상대에게 한마디를 건넨다. 베토베토산은 약한 괴이 같으면서도 인간이 어두운 길을 독점하고 있지 않음을 상기시켜 준다.